기표소 안의 당연한 권리, 그 ‘당연함’에 이르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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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표소 안의 당연한 권리, 그 ‘당연함’에 이르기까지

【에이블뉴스 권명길 칼럼니스트】최근 다른 지역에서 한 시각장애인이 투표 보조를 요청하자, 현장 인력이 “거소투표를 하지 왜 투표소에 왔느냐”고 차별적 발언을 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참 씁쓸하면서도 남 일 같지 않았다. 나 역시 투표소에서 이와 비슷한, 어쩌면 더 당혹스러운 경험을 여러 번 겪었기 때문이다.

​내가 사전투표 대신 선거일 투표소에서 투표하기 시작한 건 코로나19 이후부터였다. 그 전에는 장애인 동료들과 모여 사전투표를 하곤 했는데, 그때는 별다른 불편함 없이 투표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홀로 선거일 지정 투표소를 찾기 시작하면서부터 투표소 안에서 번번이 장벽에 부딪혔다.


투표소 안내.  ⓒ권명길
​몇 년 전의 선거일이었다. 신분증 확인을 마치고 기표소로 들어가기 전, 장애인활동지원사가 투표 보조 해야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자 선관위 측은 현장 인력 중 몇 명을 지정하더니 함께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기표소 앞으로 가니, 무려 다섯 명의 사람이 모였다. 나와 활동지원사, 그리고 선관위가 지정한 인력 3명.

​황당하게도 좁은 기표소 안을 선관위 인력 3명이 꽉 채우는 바람에 내가 들어갈 공간은 없었다. 우선 제가 먼저 들어갈 테니 뒤에서 지켜봐 달라고 요청하자, 한 직원이 “그냥 말로 하시면 된다“고 했다. 순간 ‘기표소에 음성지원 기능이 생겼나’ 싶었지만 그럴 리 없었다. 비밀투표인데 어떻게 말로 하느냐고 항의하자 그제야 공간을 비켜주었다. 투표를 마친 후 울산선관위에 전화를 걸어 규정이 바뀐 것인지 물었다.

공직선거법 제157조 제6항

“시각 또는 신체의 장애로 인하여 자신이 기표할 수 없는 선거인은 그 가족 또는 본인이 지명한 2인을 동반하여 투표를 보조하게 할 수 있다.”

​가족이 아닐 경우 부정 선거를 방지하기 위해 반드시 2인을 동반하도록 한 법적 근거가 있었다. 선관위 관계자는 규정이 바뀐 게 아니라 “현장 담당자가 규정을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하느냐의 문제“라고 답했다. 아무리 그래도 장애 특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과도한 해석이었다. 나는 재발 방지를 요청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다시 선거일이 찾아왔다. 이번에는 괜찮을 거라는 기대감을 안고 투표소로 향했다. 장애 유형과 동행인을 확인하는 절차가 생겼다. 기표소에는 나와 활동지원사, 그리고 선관위 인력 1명까지 총 3명만 들어갔다.

​갑자기 기표소 안에서 내 장애 특성을 잘 아는 활동지원사의 보조를 막아선 채, 선관위 인력이 직접 돕겠다고 나선 것이다. 나를 모르는 사람에게 투표하기 위해서 내 몸을 설명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겨우겨우 원하는 후보 칸에 잉크를 묻히는 수준으로 도장을 찍었고... 무효표가 될 것만 같아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선관위 인력이 그 위에 도장을 한 번 더 꾹 찍었다. 보지 않고 찍었다는 그의 말에 헛웃음이 나왔다. ‘활동지원사가 옆에서 투표용지 받침대만 잡아주게 했어도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렇게 투표를 하고 나니, 투표소에 가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포기할 수는 없었기에... 올해 선거를 앞두고는 동료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관련 규정을 철저히 숙지한 후 다시 투표소로 향했다.

​지난번과 같았다. 기표소 안에서 선관위 인력이 또다시 직접 보조를 하려고 하기에, 이번에는 단호하게 말했다.

“활동지원사님은 제 장애 특성을 잘 아니까 직접 투표할 수 있게 보조하게 두시고, 선생님은 공정성을 감시하는 관리·감독만 해주시면 안 될까요?”

잠시 머뭇거리던 직원은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날 나는 온전히 내 손으로 직접 투표용지에 도장을 찍을 수 있었다. 기표소를 나오는 발걸음이 그렇게 뿌듯할 수 없었다. 이 한 표를 행사하기 위해 몇 년간 선관위와 씨름을 해야 했던 걸까. 비로소 나 역시 이 사회의 평범한 국민임을 온전히 인정받은 기분이었다.

​중증장애인의 투표 보조는 시혜나 특혜가 아닌 법에 명시된 정당한 권리다. 선거 때마다 현장 인력의 개인적인 해석과 재량에 따라 장애인의 투표 환경이 좌우되는 일은 이제 멈췄으면 좋겠다. 촘촘한 매뉴얼과 함께 현장 인력들의 장애인식 개선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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